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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7. 17世 〉13. <부정공>사복시정공휘정직가장(司僕寺正公諱廷直家狀)
1. 문헌 목록 〉17. 17世 〉15. <부정공>처사휘성하묘지명(處士諱成夏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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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부정공>성균생원공휘숭하가장(成均生員公諱崇夏家狀)
成均生員公諱崇夏家狀 公姓趙氏諱崇夏字尙仲初諱思顔玉川人天分異甚端重莊靜幼而岐㠜好學不倦及長聞鰲川韓先生伯愈又得文敬公愼獨齋金集之學於崔寬谷瑞琳之門遂往學力叩微旨潛心義理深得其傳而辛丑禍起杜門晦跡築室前峴扁以書堂盖有慕於茂叔九江之書堂迂叟洛陽之書堂而然也甲辰伸雪後以親命朴擧乙卯中司馬與閔正獻公百祥孝安公樂性奉事李公權直長李益熙宋公必寧趙公棨沈公鑰同參一榜以太學掌議講明禮學遠近學者推重焉公事親孝勤治身儉約待宗族曲盡恩義遇賓客一以恭敬無專卑咸盡歡心戊午丁內憂己未丁外憂檢殯葬祭一遵晦翁家禮値喪餘之日悲號如袒括時人無不感服遠祖諱璋高麗檢校大將軍三傳而諱元吉 恭讓朝以定策勳封玉川府院君號農隱諡忠獻享武夷院性潭宋先生撰享文勉菴崔先生撰神道碑銘四傳而諱瑜官副正號虔谷入我 朝屢徵不就入杜門洞及歿禮葬綽楔享謙川祠遜齋朴先生撰享文淵齋宋先生撰墓碑銘虔谷孫諱智崙爲察訪兄弟四人作亭共處扁以相好淵齋宋先生登臨有時勉菴崔先生撰墓碑銘察訪孫諱大春號三灘 與河西金先生玉峰白先生爲道義交遊漾碧亭有河西重峰松江三先生諱淵齋先生再臨鐫啣又撰墓表三灘曾孫諱時聖號觀水亭以至孝聞載輿覽於公爲高祖考諱泰望從遊忠正金公在魯門明於禮學己巳辛丑士禍時築亭扁以詠歸因以號焉與多士講學敎子以義方有詩集禮說亦有至行今 上辛卯幷施褒宅之 曲妣文化柳氏士人景昌之女孝敬慈惠亦嚴於勤課之道雖古賢婦無以過也公生於 肅廟戊寅四月初二日歿于己巳六月六日葬於前峴乾坐原配宜人全義李氏士人光金女石灘文貞公愼儀五世孫端儉賢淑事姑盡其孝奉祭祀致其誠後公三十年而戊戌十月六日歿合祔於左有三男四女長諱胤淳親老乏鮮飛雉入廚有鄕道狀次諱聖淳出爲叔父諱器夏后季諱應淳以行誼聞女適文化柳德壎忠州朴采東晋州姜啓福全州李可學胤淳男諱重根事 親至誠世稱孝門次諱弘根景根應淳以聖淳之男諱邦根爲嗣女適瑞山柳東卨重根男諱宗燁弘根男諱遇燁女適尙州朴允源景根以鼎燁爲后女適仁川李重休邦根男諱觀燁有文行而早世士林嗟惜次馨燁出爲聖淳男諱澤根後女適縣監濟男王啓疇 皇朝名進士以文後其子謹鎬營將次女適扶安金漢弼觀燁男諱龍奎早失怙恃於重堂季慈極盡孝敬登 聞入啓餘不盡述公之平生事實藏於宗家屢欝攸只得咏歸堂詩集一卷則三父子之주酬唱不下於嵋山之蘇家河南程門也公之弟器夏亦從學於尹文獻公屛溪先生鳳九門勵志篤學不求聞達公歿時痛哭語人曰若使吾割此臂而兄若生還則吾當割此臂也此載江南樂府而非友愛之篤烏能如是哉 六世孫 學洙 謹狀 성균생원공휘숭하가장(成均生員公諱崇夏家狀) 공의 성은 조씨요, 휘는 숭하(崇夏)며, 자는 상중(尙仲)이고, 초휘는 사안(思顏)이요, 순창인이다. 천품이 단정하고 무거우며 씩씩하고 침착하여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학문을 좋아하고 힘쓰더니 자라매 한백유(韓伯愈)선생이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학문을 관곡(寬谷) 최서림(崔瑞琳) 문하에서 얻었다는 말을 듣고 가서는 배우며 힘써 은미한 뜻을 묻고 마음을 의리에 잠겨 깊이 전한 것을 얻고 신축년에 화변이 일어나 문을 막아 자취를 감추고 앞 고개에 집을 짓고는 서당이라 이름하니 무숙(茂叔) 주염계(周濂溪)의 九강 서당과 우수(迂叟) 사마온공(司馬溫公)의 낙양 서당을 생각한 것이다. 갑진년에 신설(伸雪)하니 어버이 명령으로 과거에 나가 을묘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정헌공(正獻公) 민백상(閔百祥), 효안공(孝安公) 홍낙성(洪樂性), 봉사(奉事) 이공권(李公權), 직장(直長) 이익희 (李益熙), 송필녕(宋必寧), 조공계(趙公棨), 심공약(沈公鑰)과 더불어 동반 진사로 태학장의(太學掌議)로써 예학을 강명하니 원근의 학자가 추중(推重)하였다. 공이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몸을 검약하게 다스리며 종족을 은의로 대접하고 손님을 경대하며 존비의 차별이 없이 다 기쁜 마음을 가지게 하였다. 무오년에 모친상을 당하고 기미년에 부친상을 만나 염빈장제(殮殯葬祭)에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준행하고 탈상한 후에도 슬피 부르짖기를 초상 때와 같이하니 당시 사람들이 감복하지 않은 자 없었다. 원조(遠祖) 휘 장(璋)은 고려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이요, 三전하여 휘 원길(元吉)은 공양왕(恭讓王)때의 정책훈(定策勳)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지고 호는 농은이요, 시호는 충헌이며, 무이서원에 배항되었다. 四전하여 휘 유(瑜)는 벼슬이 부정이요, 호는 건곡이며, 이조에서 여러번 불러도 나가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별세하시니 정포하며 겸천사에 배향하였다. 건곡 손자 찰방 지륜(智崙)은 四형제가 정자를 지어 함께 거처하며 상호(相好)로 현판하였다. 찰방 손자 휘 대춘(大春)의 호는 삼탄인데 김하서(金河西), 백옥봉(白玉峰) 두 선생과 더불어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양벽정에서 참화한 김하서, 조중봉, 정송강, 세 선생의 시가 있으며, 송연재선생이 두번 올라 성함을 새기고 또 묘표를 찬하였다. 삼탄공의 증손 휘 시성(時聖)의 호는 관수정인데 효행으로 정문이 있어 「여지승람」에 등재되었으니 공의 고조요, 고의 휘는 태망(泰望)인데 충정공(忠正公) 김재노(金在魯)의 문하에 종유하여 예학(禮學)에 밝았고 기사년과 신축년 사화때에 정자를 지어 영귀(詠歸)로 현판하고 이를 호로 삼았으며 많은 선비와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고 자손을 옳은 길로 가르치며 「시집(詩集)」과 「예설(禮説)」이 있으며 지극한 행의가 있어 고종(高宗) 신묘년에 아울러 정포의 은전을 베풀었다. 비는 문화유씨 경창(景昌)의 딸로 효경자혜(孝敬慈惠)하였으며 또한 자손을 교육한 도리에 엄정하니 비록 옛적의 현부라 하여도 능히 미치지 못하였다. 공이 숙종 무인년(一六九八) 四월 三일에 출생하여 기사년 六월 六일에 별세하니 앞 고개 건좌원에 안장하였다. 배는 의인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인 광전(光金)의 딸로 석탄(石灘) 문정공(文貞公) 신의(愼儀)의 五세손인데 단아하고 현숙하여 시어머니를 섬기며 효도를 다하고 제사를 받들며 정성을 극진히 하다가 공보다 三十년 후인 무술년 十월 六일에 별세하니 공의 묘소 좌측에 합봉하였다. 三남四녀를 두었는데 남장 윤순(胤淳)은 늙은 어머니의 반찬이 없으매 꿩이 부엌으로 날아 들어옴으로 고을과 도의 천장이 있었고 차남 성순(聖淳)은 숙부 기하(器夏)의 후사로 출계하였으며, 계남 응순(應淳)은 행의로써 영문이 있었다. 여는 문화 유덕훈(柳德壎), 충주 박채동(朴采東), 진주 강계복(姜啓福), 전주 이가학(李可學)의 처였다. 윤순(胤淳)의 남 중근(重根)은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겨 세상에서 효문(孝門)이라 칭하였고 홍근(弘根), 경근(景根)이다. 응순(應淳)은 성순(聖淳)의 아들 방근(邦根)을 후사로 삼고 여는 서산 유동설(柳東卨)의 처였다. 중근(重根)의 남은 종엽(宗燁), 정엽(鼎燁)이요, 홍근(洪根)의 남은 우엽(遇燁)이며, 여는 상주 박윤원(朴允源)의 처이고 경근(景根)은 정엽을 앙자로 삼았으며, 딸은 인천 이중휴(李重休)의 처다. 방근(邦根)의 아들 관엽(觀燁)은 문행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애석해하였고 둘째 아들 형엽(馨燁)은 택근(澤根) 후사로 출계하고 딸은 현감 제남(濟男) 왕계주(王啓疇)의 처로 황조(皇朝) 명진사 이문(以文)의 후예요, 그의 아들 근호(謹鎬)가 영장(營將)이며, 차녀는 부안(扶安) 김한필(金漢弼)의 처였다. 관엽(觀燁)의 남 용규(龍奎)는 일찍 부모를 잃고 조부모 및 계모에게 극진히 효경하여 입계등문(入啓登聞)되었으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평생 사행 초고를 종가에 장치하였다가 자주 화재를 입어 소실되고 다만 「영귀당시집(詠歸堂詩集)」 一권을 얻으니 세 부자의 수작하고 참화한 것이 미산(嵋山)의 소동파(蘇東坡)와 하남(河南) 정이천(程伊川)의 가문보다 못하지 않았다. 공의 아우 기하(器夏)가 또 문헌공(文獻公) 병계선생(屛溪先生) 윤봉구(尹鳳九)의 문하에 종학하여 뜻을 가다듬고 배움을 독실히 하되 영문(令聞)과 현달(顯達)을 구하지 않고 공이 별세할 때에 통곡하며 사람들에게 말하되, 『만일 나로 하여금 팔뚝을 잘라서 형님이 만일 살아서 돌아온다면 내 마땅이 이 팔뚝을 자르겠다.』 하니 이 사실이 강남악부(江南樂府)에 등재되었고 우애의 독실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六世孫 學床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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